줄거리

 

회사 중역인 엔제이는 어느 날 옛애인인 세리를 만난다. 엔제이의 아내 밍밍은 어머니가 혼수상태에 빠지자 괴로움을 견디기 위해 수도원에 들어가고, 딸 팅팅은 친구의 애인에게 사랑을 느낀다. 또한 초등학생인 아들 양양은 학교 생활에 적응하지 못하는 한편 이성에 눈을 뜨게 된다. 혼수 상태에 빠진 어머니의 의식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무엇이든 가족의 이야기를 하는 것이 중요하지만, 단절된 가족인 이들은 어머니에게 건넬 말이 없다. 결국 이것을 계기로 이들은 각자의 삶을 돌아보게 되는데...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하나와 하나는 합쳐져서 둘이 된다. 그것은 반대로 이야기하면 둘은 하나와 하나로 떨어지기도 한다는 것이다. 굳이 하나 그리고 둘이라는 제목을 붙인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세상의 절반' 밖에 보지 못한다는 양양의 말처럼, 우리는 필연적으로 절반밖에 알아차리지 못한다. 그러니까, 절반과 나머지 절반의 진실이 마주보았을때 둘이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와 둘만 존재하는 것이다. 하나를 인식하고 있는 상황에서 그것은 그대로 축적되어 있고, 나머지 절반의 세상을 인식하게 되었을때에, 이미 존재하는 하나를 부정하며 다시 하나라고 읽는 것이 아니라 한데 묶어 둘이라고 읽는 것이다. 에드워드 양에게는 아마 세상이라는 것은, (혹은 영화라는 것은) 축적되는 시간의 묶음인 것 같다. 세상이 원래 하나인데 절반밖에 보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은 원래 둘인데 하나밖에 보지 못하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앞서 알아차리게 된 하나에 대한 예의다. 결코 에드워드 양은 감히 소거법을 쓰지 않는다.

 

 

 

 

 

 

 

 

 포스터 속의 문구를 그대로 따라가보자. '보지 못하는 뒷모습 같은 나머지 진실, 반쪽이 담긴 영화..' 영화속의 '어린' 아들 양양은 문제아다. 웃기는 건 양양이 그다지 큰 사고를 치고 다니는 학생은 아니라는 점이다. 양양은 그저 또래의 친구들만큼 개구질 뿐이다. 그러나 유독 양양은 그 세계에서 존중받지 못한다. 그러던 중 양양은 어떠한 '계기'로 뒷모습을 찍어나간다. 위의 저 장면은 양양이 찍어둔 뒷모습 사진들을 아버지인 NJ가 발견하는 장면이다. (다행히 어느 신파드라마나 홈드라마 속 아버지가 이게 도대체 뭐니하고 혼내는 장면처럼 '유치한' 장면은 없다.) 그렇다면 양양은 어느 순간부터 자신의 뒷통수를 '인식'하기 시작했는가. 첫번째 질문은 그것이다.

 

 

 

 

 

 

 

 

 영화가 시작하고나서 (정말) 얼마되지 않았을때, 양양은 뒷통수를 친척들에게 '혹사' 당한다. 다소의 농담이지만, 이때까지의 뒷통수는 '세계의 절반'이기는커녕 친척들에게 놀림당하는 수많은 것들 중 하나에 지나지 않았다.

 

 

 

 

 

 

 

 양양은 뒷통수를 직접적으로 찍기 이전에도 사진을 찍고 있었다. 양양의 관심사는 '공간'이었던 것 같다. 더 '진실'되게 이야기 한다면 '시선'이다. 필연적으로 사람이 지나쳐버린 공간은 시간으로 묶어둘 수가 없다. 양양은 그 공간을 바라보게 된다면, 그 공간을 바라보았던 과거시점 혹은 미래시점의 누군가와 순간 일체가 될 수 있을거라고 믿었던 것은 아닐까. 만약 그것이 혼수상태가 되어버린 할머니에 대한 양양 본인 스스로의 기도같은 행위이기도 했다면 과장일까.

 그러나 양양의 사진은 '발견'되어버리고, 그를 정말이지 못살게 굴던 교사는 '이게 아방가르드 예술이구나'라며, 비꼬는 듯이 양양의 사진을 사실상 능지처참해버린다.

 자의식을 가지고 만든 자신의 무언가가 세상과 살이 닿아버리는 순간 녹아버린 경험은 다들 한번씩은 있을 것이다. 비웃어지고, 심하면 찢기고, 찢는 것은 나기도 하고 타인이기도 하고. 양양은 이 순간 이후에도 물론 사진을 찍는다. 양양은 이 순간 '아집'이 생긴 것이다. 나는 그 '아집'이 예술을 만든다고 믿는 사람이다.

 

 

 

 

 

 

 양양은 단단히 뿔이 났고, 교사가 물폭탄을 뒤집어 쓰게 만드는데 성공한다. (물론 그 교사에게 유독 이쁨받던 소녀에게 던지려던 것이 불발된 것이었다. 하지만 어찌되었건 복수는 성공했다.) 양양은 교사를 피해 도망치고, 학교 안의 시청각실 같은 곳에 숨어든다. (영화관이라고 느껴질만큼 공간이 흡사한)

 여기서 양양은 뒤늦게 들어온 (본인이 싫어하는) 소녀가 앞자리에 서 있는걸 본다. 이 장면은 이 영화에서 가장 신비로운 순간중에 하나다. 양양이 뒷통수를 '인식'하게 되는 순간이자, '사람'을 찍어야겠다고 생각하는 순간이다. 양양은 두가지를 새삼 느낀 것이다. 첫번째는 자신이 그렇게 싫어하던 소녀의 뒷모습이 아름다운 것을 보고, 결국 인간을 긍정하는 것은 그 절반을 바라보는 것이라는데에 생각이 이른 것이다. 두번째는 뒷모습을 찍는 것이, 자신이 그토록 원하던 절반의 모습을 알아낼 수 있는 묘안이라고 깨달은 것이다.

 

 

 

 

 

 

 

 영화에서는 모든 장면은 당연히 아니지만, 극단적일 정도로 뒷통수와 정면이 대비되는 장면이 몇 장면 있다. 당연히 이 영화를 만든 이는 양양이 아니라 에드워드 양이다. 이쯤되면 당신은 무엇인가를 눈치채야 한다. 양양이 찍어내는 뒷통수와 에드워드 양이 찍어내는 뒷통수, 양양이 찍었던 '아방가르드'한 도시의 모서리와 에드워드 양이 찍었던 (사람은 분명히 존재하지만 정말이지 쓸쓸한) 전경에서 묘한 동질감을 느꼈다면 영화를 본 당신은 알아차려야 한다.

 

 

 

 

 

 

 

 

 어린 양양은 아버지에게 불현듯 이렇게 묻는다. '아빠가 보는 걸 어떻게 내가 볼 수 있죠?' 아버지는 대답한다. '그게 카메라가 필요한 이유란다. 갖고 싶니?' 양양은 또 묻는다. '아빠, 진실의 반을 볼 순 없을까요?' 아버지는 다른 질문으로 그에 대한 대답은 회피한다.

 물론 하나 그리고 둘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파편은 모두 '에드워드 양' 자신일지도 모른다. 그의 모습중에 여러 파편들을 흩날려 놓은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적어도 이 장면만큼은.. 적어도 양양만큼은.. 에드워드 양의 분신 그 자체라고 나는 믿고 있다.

 영화에서는 종종 마법을 부린다. 그것은 화면을 황홀한 색체로 뒤덮거나, 조명이 적당하게 어둡거나 하는 그런 종류의 것이 아니다. 가끔 영화가 '지나가버린 시간에 서있는 사람'을 불러와 '현재'와 마주치게 할때가 있다. 나는 이게 영화 속에서 온갖 묘기들을 부리는 것보다도 진정한 의미의 마법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에드워드 양은 그 시절, 그러니까 현재 자신의 나이만큼대의 아버지에게 묻고 싶었던 것이다. '영화란 무엇입니까?' '세상은 무엇입니까?' 에드워드 양은 이 질문을 하기 위해서, 자신을 어린 아이로 변장시켰고, 자신의 체험을 마치 영화속에 혼재시켜놓은 것처럼 풀어놔서 양양이란 아이를 아직 성장하고 있는 소년처럼 비추게는 만들지만 양양은 곧 에드워드 양의 현재인 것이다. 혹은 에드워드 양의 풀리지 않은 숙제인 것이다.

 중요한 것은 질문이다. 하지만 질문만으로는 쉽게 지쳐버린다. 오독이라 할지라도 답이 필요하다. 누군가가 답을 던져줘야만 한다. 그래야 믿고 살 수 있는 것이다. 양양은 물었고, 아버지는 대답했다. '그게 카메라가 필요한 이유지.' 에드워드 양은 영화가 세상속에 존재하는 이유를 이렇게 간절히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영화는 미쳐 보지 못했던 세상의 이면과 사람의 시선을 쫓아가서 한데 묶어 놓을 수 있는 예술이다. 그때, 에드워드 양의 현재와, 과거가 한데 묶이는 것이다.

 아버지는, 진실의 반을 볼 순 없는걸까요? 하는 질문에는 대답하지 못한다. 아마 그것은 '그 시점'의 아버지에게는 별달리 알 수 있는 방법이 없었을지도 모르겠다. 자신의 부인도, 자신의 옛애인의 마음도, 알지 못하는데, 어찌 세상의 절반을 어떻게 보는지 그 방법을 알 수 있을까.

 

 

 

 

 

 

 

 

 양양은 그 답을 불현듯 던지고, 아버지도 그 답을 불현듯 깨닫는다. 양양이 삼촌에게 그의 뒷통수를 찍은 사진을 전해준다. 삼촌이 뒷통수를 왜 찍었냐고 묻자, 양양은 대답한다. '삼촌이 자신을 못보는 것 같아서 제가 도와준거에요.'

 결국 진실의 반을 발견하는 것은 '둘'이어야 가능한 것이다. 그러니까 '진실'은 곧 '사람'인 것이다. 서두에서 이야기했다시피, '하나'가 또 다른 '하나'를 발견했다해서 양자택일의 형태로 하나가 잊혀지지는 것이 아니라 둘로서 축적되는 이유는 그것이 가리키는 것이 결국 '사람'이기 때문이다. 불완전한 시간의 묶음 속에서 그것을 매듭지어줄 수있는 것은 사람이다. 그래서 하나 '그리고' 둘인 것이다. 하나 '다음에' 둘도 아닌, 하나 '혹은' 둘도 아닌, 하나 '그리고' 둘인 것이다. 인간의 시간은 '둘'이면서도 '하나'이기 때문에 그 '하나'를 기억하면 '둘'을 잊고, '둘'을 기억하면 '하나'를 잊는 것이다. '둘'과 '하나'를 한데 합치는 것은 '영화'가 해줄 수 있는 일이고, 만약 영화를 본 사람이 자신의 '하나'와, 둘일때의 '하나'를 마주치게 한다면 '하나 그리고 둘'은 그 어구를 바꾸어도 성립가능한 것이다. 그제서야 둘을 하나라고도 부를 수 있는 것이다. 영화는 1+1=2라는 수학적인 진리를 뛰어넘어서 1=2가 가능하다는 것을 설득시키는 영화다.

 

 

 

 

 

 

 

 

 욕조에서만 첨벙첨벙 뛰어놀던 양양은 영화 후반부, 수영장으로 뛰어든다. (양양은 살아서 집으로 돌아온다.)

 

 

 

 

 

 

 

 

 틴틴은 꿈을 꾸는 것만 같다. 릴리, 패티, 할머니, 그리고 가족들 사이를 부지런히 오간다. 틴틴에겐 어떠한 과거의 편린도 보이지 않는다. 영화 속 벌어졌던 이 기나긴 여정이 그녀의 일생에서 '과거'로 새롭게 자리할 것이기 때문이다. 틴틴의 성장통은 하나 그리고 둘에 나오는 어떠한 인물들의 성장통보다도 비극적이다.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1991, 에드워드 양)에서처럼 소년은 결국 사람을 죽인다. 틴틴에겐 무덤덤한 표정만이 남아있다. 에드워드 양이 제일 가혹하게 인물을 다룬 장면이라고 생각한다. (방의 창가에 앉아, 무덤덤히 본인이 키우는 화분을 쳐다볼 때)

 

 

 

 

 

 

 

 현대를 배경으로 한 영화가 신화 같은 장면을 만들어내는 것이 그렇게 어려운 일은 아니다. (물론 그 공간들을 발견해내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할머니가 마치 살아돌아온 것처럼 문 사이 얇은 틈, 웃는 모습으로 카메라로 시선을 돌릴때, 저 문 틈 사이는 더 이상 아파트의 협소한 공간이 아니고 미지의 동굴처럼 거대한 공간이 되는 것이다. 우주를 CG로 재현해낸 장면들보다도 이 장면은 우주적이다. 나는 우주라는 것은 '산자와 죽은자의 경계가 없는' 곳이라고 생각한다. 이 순간만큼은 할머니와 틴틴은 '산 것도 죽은 것도 아닌' 우주가 된 것이다.

 

 

 

 

 

 

 

 

틴틴이 아직 꿈에 남아있을 때와, 깨어날 때 그 사이에 화분을 비춰주는 것은, 틴틴이 그 우주에서 벗어나 이 대지에 결국 발을 붙이고 아직도 살아가야만 하는 '대지위의 생명'임을 조금은 뻔하게 보여주는 것이다.

 그리고 틴틴과 할머니의 대화장면은 정말 명장면이다. 그 부드러운 할머니의 손길은 보는 사람마저 안식에 접어들게 할 것이다. 틴틴이 던지는 '왜 세상은 우리 생각과 다를까요?'라고 묻는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은 양양의 질문처럼 녹록치 않을 것 같다. 양양은 그나마 자신의 생각을 해답으로 내놓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영화를 만드는) 자신의 손이 닿는 영역이다. 그러나 틴틴이 던지는 질문에 대답을 하기엔 세상은 너무 거대하다. 그러니까 양양이 던진 질문이 손이 닿는 '우리'에 대한 질문이라면, 틴틴은 손이 닿을 수 없는 '세상'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양양에게 아직 세상은 찍을 수 있기에 '우리'라 부를 수 있는 것이고, 틴틴에게 세상은 대답은 듣지 않고 욕만해대는 가혹함이기에 '세상'이라며 타자화하는 것이다.

 틴틴은 꿈의 마지막 말에 이렇게 이야기한다. '전 눈을 감을게요. 제가 보는 세상은 너무 아름다워요' 사실 이것은 말이 되지 않는 이야기다. 그렇다고 틴틴이 비꼰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그렇다면 도대체 보는 세상이 아름다운데, 눈은 왜 감는다는 것일까. 그것은 영화 내내 틴틴이 이루지 못했던 '잠'과 연결지어야 한다. 눈을 감아야만 내일을 볼 수 있다. 그러니까 여기서 잠이라는 것, 눈을 감는다는 것은 회피가 아니다. 생명의 본능이자 세상을 아름답게 살고자하는 의지의 첫걸음이다.

 

 

 

 

 

 

 

 

 에드워드 양은 이제 숏에 사람을 혼자 내버려두는 일을 하지 않는다. 자, 앞에서 일기를 읆는 양양. 그럼 가족의 세 사람이 남았다. 그렇다면 이들을 한 숏 안에 찍을 때 어떻게 하면 이들 중 한명도 숏에 담기는 그 순간에 혼자두지 않을 수 있을까. 처음 카메라가 비추는 장면에서 남편은 부인 뒤에 서 있다가, 카메라가 이동하면서 그 동선을 따라 움직이며 부인은 카메라 밖으로 빠지고 혼자 앉아있는 틴틴의 옆으로 남편이 앉는다. 그럼으로 인해서 이 숏안에서 혼자 비춰지는 인물은 없는 것이다. (양양은 목소리로서 그 자리에 계속 존재한다) 나는 그 영화가 말하려는 바가 그 숏과 떨어지지 않고 맞붙어 있을 때 그것이 영화적으로 완성된 영화라고 생각한다. 이 순간, 이 가장 중요한 장례식 장면을 에드워드 양은 이렇게 찍어낸 것이다. 한 숏. 하나의 움직임. 두개의 관계. 세 명의 사람을 비추지만 네 명의 사람을 담고 있을 때. 이게 바로 카메라가 사람을 찍어내는 예의이고, 영화가 사람을 담아내는 예의인 것이다. 영화가 스스로 어떠한 대답을 세상으로부터 들었을때, 그 이후의 장면에서 함부로 사람을 홀로 내팽겨 두는 일 따위는 너무 무책임한 것이다.

 

 

 

 

 

 

 

 

마지막 장면. 양양의 모든 말은 내 마음을 울렸다.

자, 당신의 하나는 누구입니까. 당신의 둘은 무엇입니까.

결국 영화는 세상을 바라보는 창구이자, 예의이며, 세상 그 자체다.

영화가 어학사전 속 의미로서의 영화로만 끝나버린다면 영화는 절반의 진실밖에 되지 못하는 것이다.

결국 영화를 채워주는 것은 영화를 본 사람들이다.

영화를 다 보고 나서 시선을 세상에 돌릴때부터 진짜 영화가 시작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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